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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희
 고문님과 엄마를 애국자로 만들었던  아이들

우리학교에는 고문님이  계신다. 브레멘에 오래산 터줏대감이시며 학교행사가 있을 때마다 참여해주시려 노력하신다. 브레멘 한국학교 입학한지 2년차 되는 아이를  학부모이자 교장이 된지  4개월이 지난  정말    모르는 회원인 나는 고문님과 개인적으로 대화는 커녕 얼굴인사도 나눈적이 없었다. 교장이 되고 처음으로 전화를 드렸다. 고문님은 학교와 가까이 사신다는 이유로 한번 놀러오마 했지만  그렇듯이 일상이 그런 기회를 줄리는 만무했다.

그러던  재독 교장협의회에서 25주년 백서 원고를  받는다는 메일을 받고  고민하기 시작했다. 학교 연혁도  써달라는데 아는  없었다. 고문님께 전화를 했다. 고문님은 학교에 관한  증인인지라 해주실 이야기가 많을  같았다. 고문님은 학교가 설립될 1983 당시 설립자인 이광택님과 뜻을 같이  분들    분이었다고 했다. 고문님은 83년도에 큰아이를  낳은터라  아기와 함께 이광택님을 도왔다고 했다. 이광택님 역시 아이들은 어렸지만 한글학교를 만드시는데 앞장섰다고 했다.  다섯 가정이 함께 하셨다고 했다. 브레멘 대학 법대 박사과정 학생이셨던 이광택님은 바로 브레멘 지방법원에 단체로 등록하셨다고 했다. 그당시 만들어진 정관은 단체 운영의 기본이 되었다.  어쩌면 작은 학교지만 지금껏 명맥을 이어올수 있었던 것도 정식 단체  등록하신 설립자분들의 노고덕분일 것이다.  지금 이광택님은 국민대학교 법과대에 명예교수로 계신다. 학교 개교할 때가 어떠했는지  물을 기회가 있으면 좋겠다. 이광택님의 아이들은 한글학교를 기억하는지도 묻고 싶다. 개교에 참여하신 고문님은 83년도에 태어난 큰아이가 17살이 되는 해까지 학부모로 계셨고2000년도 초에는  4년간 학교 교장을 하셨다. 공식적인 학교주소를 여전히 고문님댁 주소로 쓰고 있고  지금까지도 고문으로 도와주시고 계시니  정말 감사하고 감사하지 않을수가 없다.

내가 도움을 청하고자 전화를 했을 때고문님은  따님이 있는 미국에서  귀국을 하셨다고 했다.  학교 역사가 궁금하다고 했다.드라마 같은 이야기가 있진 않다고 하셨다.  그저 당시에 어떻게 만드실 생각을 하신건지 알고 싶다고 했다. 시간을 내주신다고 했다. 기대가 되었다. 그런데 한국학교 수업이 있는 금요일 오전에 고문님께 전화  통화를 받았다.  따로 보지말고 오후에 직접 학교에 오시겠다 했다. 고문님댁이 학교에서 멀지 않은지라  교장 얼굴도, 요즘 학교 분위기도 보실겸 들르신다 하셨다.  학부모 세미나가 수업과 맞물려 계획되어 있긴 했지만 나는 영상으로 진행되는 세미나  내용을 미리 봤으니 문제될것도 없었다. 물론 세미나 진행때문에 대화가  종종 끊어졌다.고문님은 괜찮다고 하셨지만 지면을 빌어 고문님께 사과하고 싶다.

 

모든 아이엄마들이 그렇지만 아이들 이야기할때 가장 빛난다. 고문님은 학교가 개교될 당시를 말씀해주셨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고문님의 아이들이 얼마나 재미있게 학교를 다녔는지 이야기하셨다.   지금은 성인이 ,각자 자기 터전에서 성실하게 살아가고 있는  자랑스러운 고문님의 아이들. 

고문님은 당시 다른 분들처럼 간호사로 독일에 와서 일하고 계셨는데 아이들이 태어났어도 돌볼사람이 없어 한국에서 어머니가 오셔서 5년간 도와주셨다고 했다. 당연히 어머니는 독일어를 못했고 아이들은 그런 할머니와 생활하면서 자연스럽게 한국어를 했다고 했다. 고문님은  당시 규칙을 만드셨다고 했다. 집안에선 한국어, 집밖에선 독일어. 아이들도  따라 주었고 한글학교를 다니면서  발전하는 모습에 뿌듯했다고 했다. 특히 작은아이 경우 지적장애가 있다고 한다. 기대 하지 않았는데 한글학교를 다니기 시작  6개월만에 글을 읽었다고 했다. 잘못들은 건가 싶기도 하고 놀라기도 해서 신문을 가져와 보여줬다고 했다. 차근 차근 읽는 모습에 눈물이 났다고 했다. 무척이나 감동스러웠다고 했다. 한글학교 선생님들은  장애인 교육 전공자도 아니었는데 최선을 다해 성심성의껏 아이들을 가르치셨다고 했다. 조금 늦은 아이었는데도 하나하나 신경써주셨다고 했다.작은 학교의  장점이 아닐까. 

큰아이가  6살인가 되던해에 큰아이랑 처음으로 한국에 갔던 이야기를 해주셨다.  지금도 고향에 가는길 갔다오는 길은 항상 그렇지만 당시엔 그저 방문하는 것인데도 바리바리  이민가방을 두개나 가져가셨다고 했다. 세관이 지금보다 심해 일일이 검색을 당했다고 했다. 고문님도 세관 검색대에서 짐을 풀고있는데 그걸 보던 큰아이가  세관원에게 구수한 전라도 사투리로 아저씨 우리엄마는 돈이 없소, 그래서  값나가는 물건도 없당게..“ 말했다고 했다. 아이 사투리에 깜짝놀란 세관원은 아이 여권을 살피기 시작했다. 아이가 태어나 처음 한국방문인걸 알고는  놀라면서  어이쿠 너는 정말 한국말을 잘하는구나.어디서 배운거야? 한국말을 이렇게 잘하다니 엄마가  잘가르쳤어. 너희 엄마는 애국자야 애국자  라며  특별히 검색하지 않고 통과시켜줬다고 한다.  문제 없이 통과되었다는 기쁨보다 아이덕에 갑자기 애국자란 소리를 들은 고문님은 뿌듯하기가 이루 말할수없었다고 했다.  그런 큰아이는 한국에 가도 기죽지 않고 한국  아이들과  어울렸다고 했다. 자주 못가는 고향이지만 그렇게 아이들과 한번씩 다녀오면 브레멘을 가로질러야 갈수있는,   반대 끝에 있는 있는 한국학교 다니는게 힘들지도 않았다고 했다.

큰아이는   17 아비투어를 보기 전까지 한글학교를 다녔다고 했다.  사춘기가 되던 시절은 여느 아이들 처럼 학교를 다니고 싶지 않아했다고 했다. 하지만 고문님이 걱정할 새도 없이  시기를 스스로 극복하고 아비투어 보기전까지 다녔다고 했다. 한글학교다니는 목적을 스스로 깨달은 것처럼 보였다고 했다.   의대에 진학였다.  의대 재학중에 실습학기를 한국의 아산병원에서 보냈다고 했다.  병원엔   아이를 포함 다른 여러나라에서  한국계 학생들도 많았는데 유독 한국어에 문제가 없던 큰아이는 교수님들과 여러 관계자 분들의 귀여움을 독차지했다고 했다. 게다가 관계자분들의 회의에도 자연스럽게 참여했다고 했다.   교수님이 큰아이의 한국어를 칭찬했다고 했다. „ 자네는 한국말을 너무 잘해서 우리가  하는데도 특별히 배려하지 않아도 되어서 너무 편해. 근데 어디서 그렇게 한국말을 배운거지?“   큰아이는 어머니 덕분이라고 했단다. 남편없이 이역말리 타향에서 간호사로 일하면서도 모국어를 잊지 않게 해준 어머니 이야기를 했더니 교수님은  감동을 하셨다고 했다. 그러면서 본인의 점심 식권을 큰아이가 있는 동안 줬다고 했다. „이건 어머니를 대접하고 싶은 마음이  . 있는 동안  점심을  먹거라 . 어머니가 정말  뿌듯해하겠어. 이렇게 잘크고 한국말도 잘해서 내가 뿌듯한데 어머니야 오죽하시겠니. 어머니가 애국하신거야. 애국자란다. “

 지금  큰아이는 의대를  끝내고 의사생활을 하다가 지금은 미국 대학에서 연구중이라고 했다. 독일에 돌아와서는 의대에서 학생들을 가르친다고 했다. 고문님의 큰아이가 나는 궁금해졌다. 아이에게 한국은 어떤 의미일까? 한국어는 무엇일까? 독일에 돌아오면 어머니 옆으로 오는거냐는 물음에 고문님은  큰아이의  2 고향인 뮌헨으로 간다 하셨다.   한번 만나보고 싶다는 나의 소망에 고문님은 언젠가 자기를 브레멘에 보러 오면 학교에 데려오마 하면서 답하셨다. 그날이 기다려진다.

 

개인적으로 성인반을 수업한지  되었다. 용돈도 벌고 독일사람도 만나자며 시작한 일이 8년이 넘어가고 있다. 처음엔 독일어도  못하는 상황에서 한국어를 가르치는 것이 쉽진 않았다. 그래도 재미있었다. 한국을 알려하는 학생들이 기특했다. 성인반을 수업하다보면 미쳐 어린시절 한국어를 배우지 못해 성인이 된후에야 배우러 오는 경우가 있었다. 종종 그들에게 팁을 얻기도 한다.  친구는 어머니가 한국분이었는데 어린시절 한글학교 가는 것이 정말 싫었다고 했다.  절대로 한글학교엔 강제로 보내면 안된다고 나에게 신신당부했다. 아이랑 합의가 있어야한다고 했다.  아이가 스스로 찾아야 한다고 했다.  친구는  재미있게도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 추어탕이라고 했다.  한국의 젊은 여자 아이들은  피자나 외국음식을 많이 좋아하는데  친구는 국물이 좋다고 했다. 나는 아저씨 식성을 가졌다고 놀렸다. 그랬더니 저도 알아요.“ 나를 만난 그날도 한국 식당에서 도가니 탕을 주문했었다.

다른  친구는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셨다. 어머니 대신인 이모랑 이야기하고 싶은데 한국어가 부족했다.  이모도 부담스러워했다. 가끔 나를 통해 조카 안부를 물으시곤 하는데 마음이 그럴때 마다   그런 학생들을 많이 만나서 일까? 우리아이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쳐야 하는 것은  의무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교장이 되면 아이들이 스스로 오고 싶은 학교를 만들고 싶었다.

 아이들이 한글학교에서 많은 추억을 가졌으면 한다. 아직 교장이 된지 몇개월 되지 않았지만 열정적인 선생님들과 조금식 변하는 아이들을 보는 것은 감격스러운 일이다. 우리 고문님 처럼 아이들 때문에 애국자가 되는 일까지는 기대하고 싶지 안다. 다만 아이들이 컸을때  한국어를 배우도록 노력한것이  아이들에게  다행이다라고 평가되었으면 좋겠다. 고문님의 개인사를  글로 쓸수있게 허락하신 고문님께 감사드린다. 



이글은 김영희 고문님의 기억을 토대로 작성되었기에 사실과 다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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